제목 삼매와 공.... 작성자 최용국
작성일 2010-01-20 오후 2:57:30 조회 3578
색계,무색계 삼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부탁드립니다.

불교수행을 하는 평범한 젊은이 입니다.
나름대로 삼매에 대해서 체험한 것이 있어(배움의 길에 있는 사람이 어리석은 소견이지만...

삼매를 자유자재로 든다거나 하지는 못하고 좀 서투르며 색계삼매는 자주 들수있고 체험내용도 확신하지만, 무색계삼매는 명확히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이런 체험에 대해서 명쾌하게 해석하거나 비슷한 체험을 한 사례나 체험에서 얻어진 지견을 어떻게 볼 것인지 그것이 정견,정사유면에서 삿된 체험과 지견이 아닌지 여러가지 책을 찾아보거나, 넷에서 강의하시는 분들께 물어봤지만 8삼매,즉 색계 무색계 삼매에대해서 체험을 바탕으로 명쾌한 설명을 하시는 분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인도를 위시한 외국에도 거의 없고 한국에도 거의 없는 듯 합니다.

제가 견문이 부족한 탓이겠지만...잘알려진 몇분의 책,설법과 넷상의 이름없는 한두분정도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삼매는 언설을 넘어있다 등으로 회피하지만, 그나마 설명하는 정도는 정신세계사이트에서 식상한 표현들이 아니면 삼매는 한가지 양상밖에 없다는 식으로 또는 초선정의 삼매를 궁극의 깨달음인양 표현하는 웃지못할 경우도 많은 듯 싶습니다.)

순일님 사이트는 우연히 검색중에 발견했는데 8삼매에 대해서 상당한 확신과 구체적으로 설명을 하시는 보기 드문 분인 것같았습니다.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8삼매의 구체적인 설명을 적어주셨으면 합니다. 진짜 관심이 있으면 책을 사보아야 하겠지만 책에 관련된 부분을 그대로 옮겨 적어주시거나 더 자세하고 보완된 설명까지 부탁드린다는 것이 결례인지는 알지만...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순일님께서는 8삼매 이상의 무아삼매(? 가장 높은 목표해야할 수행 경지를 지칭하여 무상정등각이나 무심삼매라고 하시는지 용어를 몰라서 임시로 아무 명칭을 사용하였습니다)를 들려면 전단계의 8삼매를 꼭 빠짐없이 다 거치고 능숙하게 들고 나는 것은 필수라고 가르치고 계신지요? 합장

순일 이동호 : 안녕하세요
두서 없이 장문을 써 놓았는데 모두 날라갔네요.
일심삼매는 대상 하나만 남은 상태입니다. 그것을 색계 삼매라고도 하고 천안삼매라고 분류할 수도 있습니다.

비유하면
누군가 숨을 집중할 때에 바깥쪽 세상은 모두 잊어먹겠지요.
초월하였다고 하여도 좋고 인식하지 않는다고 하여고 되겠습니다.
내면의 숨에만 몰입 되었기 때문에 바깥은 모두 잊은 것이지요.
물론 이것은 몰입니다.

집중은 몰입이 되어 보려는 노력이 담겨 있고, 이제 나아가 저절로 집중이 되어진 상태를 '몰입'이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이러하게 더 나아가면 자기도 인식하지 아니하고 잊어먹지요.
즉 '숨'만 남습니다. 이것이 일심삼매입니다.

이것을 마음적인 측면에서 이야기 한다면
애초에는 세상을 이것 보았다가 저것 보았다가
또는 자기의 굴러가는 생각들을 보았다가 합니다.
이것이 번뇌 또는 '잡생각'의 상태이지요.

이것을 어느 하나의 특정 수행주제 또는 수행대상에 집중을 함으로써 그러한 잡생각들을 어느정도 사라지게 하는 것이고요 나아가 몰입이 되어지면 이제 그 수행주에 외에는 아무런 생각(마음)이 없는 상태가 됩니다.
즉 수행대상을 향한 하나의 마음상태가 지속 또는 유지 되는 것이 바로 일심삼매입니다. (2006/10/24)

이러하게 숨만 남은 과정을 보시면 알겠지만 생각이 점점 사라져간 상태입니다.
그러니 여정상 조금 더 그 상태가 유지되면 어떠할까요?
수행주제 또는 수행대상도 사라집니다.
이것이 공무변처입니다.

불교에는 팔선정이 있습니다.
인도의 사마디가 중국으로 건너가면 음역한 것이 '삼매'이고 의역한 것이 '선정'입니다.
그러므로 팔선정은 '팔삼매'입니다.
팔삼매의 앞의 네가지는 흔히 초선 이선 삼선 사선이라고 부르는 일심삼메 네 가지입니다.

그리고 공무변처부처가 무심삼매입니다.
즉 일심삼매 넷 무심삼매 넷이 됩니다.
그리고 무상정등정각은 이 모든 것 즉 팔삼매를 넘어선 상태입니다.
순일이는 무상정편정각이라고 씁니다.

아뇩다라삼먁샴보리의 '먁'은 본래의 뜻이 '등'도 있고 '편'도 있습니다.
순일이는 편재의 뜻인 편을 쓰기를 좋아합니다.
힌두교에서 깨달음이 무언가에 대한 대답중 하나로 만물이 평등한 것이라고 합니다.

불교와 비슷하지요. 만물이 평등한 것의 문장 속 뜻은 '편재'라고 여깁니다.

개체는 만물이 평등할 수가 없을 겁니다.
즉 평등하려면 단일성의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원수를 사랑하라 역시 방편일 겁니다. 속뜻은 '원수가 없다'는 것아겠지요.
그러므로 전체로 편재한 정각이 될 것입니다.

돌아와서 숨마저 사라졌다는 것은 다시 한번 위에서 여정을 살펴봅니다.
세상도 사라졌고 나도 사라졌고 숨도 사라졌다.
그렇다면 모두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또는 안 사라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니 '초월'하였다고 표현하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요약하면
'세상과 나'가 모두 사라진 상태 이것이 공무변처라는 팔삼매중에서 다섯번째이며
무심삼매의 첫번째 경지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허나 위의 여정은 공부인의 여정입니다.
즉 세상에 대한 집착을 먼저 버리고 나 자신에 대한 집착도 버리고 그러하게 모두 사라지고 수행주제에 대한 집착마저 버려서 된 상태입니다.
허나 공부된 사람은 위의 여정에 역순입니다.
즉 마음이 사라져서 나와 세상 모두 사라진 것이 됩니다.

공무변처의 뜻을 찾아 보시면
'물질을 초월하여 공이 가이 없는 상태'라고 나와 있는게 대 다수일 겁니다.
산스크리트어의 본 뜻은 물질을 초월한 '구분 없는, 한계 없는, 끝이 없는 허공'이라고 되 있습니다.

비유해 봅니다.
강물이 마음이 있다고 해보지요.
그러한 강물의 표면에는 나무 그림자도 있고 강 건너 건물들 그림자도 표면에 비추이고 구름도 비추이고 있습니다.
맨 처음 강물은 자기 표면에 비추인 그림자들을 한번에 하나씩 어것도 보았다가 저것도 보았다가 합니다.
대체적으로 한번에 그 모든 것들을 보지 않습니다.

한번 지금 눈 앞에 컵을 두개를 놓아 보시겠어요?
그리고 그것을 양 쪽으로 자꾸 벌려 보는 겁니다.
그리고 컵 두개를 동시에 보시려고 해 보는 거지요.
두 개를 동시에 보려면 눈이 주시하는 곳은 두 컵의 중간 부분이어야 하겠지요.

이러한 상태에서 컵 두개의 간격을 자꾸 벌리시면 보여지는 상태가 됩니다.
즉 눈 앞에 하나의 사물을 두고서 명확하게 '본다'는 행위가 아니고 잘 안 보이는 즉 흐릿하게 보이는 그러한 상태가 됩니다.
우리는 대체로 이러하게 흐릿하게 보는(보여지는) 행위를 하지 않치요.
즉 한번에 하나씩만 보는 행위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가 있습니다.
놀러가서 경치 전체를 본다 입니다.
이때 기분이 좋았지요. 물론 놀러갔기 때문입니다. 허나 다른 이유는 전체를 오랜만에 보았던 것입니다. 즉 하나씩만 보다가 넓게 펼쳐서 보았기 때문이지요.

높이 나는 새는 멀리 봅니다.
마음이 넓은 이는 넓게 봅니다.
이것을 역순으로 이야기 하면 공부의 여정이 됩니다.
멀리 보면 높이 나는 새가 됩니다.
넓게 보면 마음이 넓어 집니다.

낚시꾼이 밤낚시를 수십년 합니다.
아침만 되면 다시는 안 온다고 하고 또 밤낚시를 갑니다.
밤에 물 표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각을 지을 대상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케미라이트 찌 하나만 있습니다.
이것은 일심공부가 됩니다.
무언지도 모르고 다신 안간다고 하면 가는 것이지요.
그것도 아무것도 없이 넓게 펼쳐진 물 수면이 좋아서입니다.

산악인이 히말랴야 갑니다.
죽을지도 모른다고 외경하면서도 목숨을 걸고 갑니다.
왜 가냐 물으면 '산이 거기 있기 때문에 간다'고 하면서 갑니다.
본인도 이유를 잘 모르는 것이지요.
고봉에는 나무도 없습니다. 그저 끝 없이 펼쳐진 눈만 있습니다.
거기서는 저절로 펼쳐서 넓게 볼 수 밖에 없으며 더군다나 생각을 짓게 만드는 아무런 대상도 없습니다.

그러하게 넓게 보는 행위로 인하여 마음이 넓어진 것을 본인의 의식은 몰라도 자꾸 그리로 발길을 향하게 하는 것입니다.

돌아가서
우리들은 평소에 한번에 하나의 사물만 봅니다. 그러하게 이것 저것을 보거나 또는 본인의 '잡생각'을 봅니다. 둘 다 '잡생각'의 상태지요.
이러하게 강물은 표면의 것을 한번에 하나씩만 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강물이 번뇌로워서 마음을 수심깊이 들어갑니다.
즉 바깥의 사물들을 안 보겠다고 여기고 내면으로 내면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을 일심삼매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강의 마음이 아주 깊이 들어가면 강표면의 모든 그림자들을 잊을 겁니다.
또는 인식하지 못할 겁니다. 인식의 대상이 사라지면 자기도 인식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이란 안이비설신의와 색성향미촉법의 대상의 부딪힘에 의해서 생겨납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마음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찧고 빻고에 의해서 이진법에 의해서 즉 파동을 띤 마음을 말합니다.
강 표면의 대상들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부딪힘 즉 접촉이 없습니다. 접촉이 없으면 즉 색성향미촉법이 없으면 안이비설신의가 사라진다는 가정은 근거가 있겠지요?
그러면 마음은 사라집니다.

이러하게 무심이 된 첫번째 경지가 바로 공무변처입니다.
요약하면 '세상과 나'가 사라진 상태입니다.
여기서의 '나'란 '마음과 몸' 모두 사라진 것을 말합니다.

이러다가
강물이 점점 더 내면으로 깊이 들어간다는 것은
확장을 의미합니다.
본질중에 본질이란 말은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더 전체가 된 다는 의미가 됩니다.

강물이 개체성을 점점 더 잃어가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나'가 없다는 것은 다 '나'라는 의미가 됩니다.
물론 '나'라는 것의 본질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애초라면 나가 사라지면 아무것도 없는 것이 됩니다. 허나 만약 애초의 '나'가 전체라면 나가 사라지는 만큼 전체가 드러난다는 뜻이 됩니다.
강물이 하나씩 볼때는 마음도 그만한 크기 였습니다.
이제 아무것도 인식하지 않는 강물은 크기 강전체로 확장을 합니다.
본래 강이 단일한 하나의 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심깊이 들어간다는 것은 확장을 의미하며 그것은 다시 수면 바깥쪽 까지도 전체로 확장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때 수면 바깥으로도 나오는데 이제 강전체가 되어서 수면으로도 확장되었습니다.
자 전체 세상이 들어옵니다.
즉 개체였을때 하나씩만 인식하던 세상이 모두 한꺼번에 들어옵니다.
이것이 여섯번째 무심삼매인 식무변처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구분 없는, 끝이 없는 인식에 머무는 것' 입니다.
구분없다는 것은 산과 강을 보면서 저것은 산이고 저것은 강이구나 하고 구분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끝이 없는 인식이란 인식의 한계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산과 강이 모두 '선명 선명'합니다. 분명 그 모든 것이 맑게 비추입니다. 허나 '이름'을 까먹었습니다. 마음이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그것들의 이름을 들추어 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아는데 모릅니다.
산과 강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은 산과 강 사이에 경계가 있다는 말이 됩니다.
경계가 있다는 것은 마음이 지어냅니다. 마음이 있을때는 경계가 있습니다. 구분이 있습니다. 분별이 있습니다. 허나 그러할 때에는 한번에 하나씩만 보게 됩니다.

길고 짧은 두 개의 초를 놓고 분명 선명히 모두 비추여도 길고 짧음을 모릅니다.

이러한 식무변처는 물아일체부터 우아일체까지 있습니다.
단어상으로 우아일체라고 썼지만 이것은 식무변처에서만 통하는 우아일체입니다.
즉 궁극의 경지가 아니라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인식의 범위가 위에서 썼듯이 식무변처가 되자마자 무한하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공무변처의 깊이 만큼 식무변처의 깊이가 깊어집니다.

흔히 무심삼매가 되면 영원히 무심삼매가 된다고들 생각하는 분들이 대 다수 일듯 합니다.
무심삼매가 되었다고 하여도 그것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 없고 다시 되기가 참 힘이 들다는 것이 대체적입니다.
그만큼 무심삼매가 되어도 다시 용이하게 되기가 힘 들다는 뜻입니다.
즉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의 폭이 큽니다.
그나마 전체여정의 이치와 방법이 자명해야만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를 할 수 있습니다.

공무변처에 깊이가 다 다릅니다.
공무변처가 되었다가 생각으로 돌아오면 아까 당시에는 '전체'가 아니었을까 또는 본성이 되었다고 여기기 쉽상입니다.
허나 공무변처가 종종 되어 본다면 스스로는 그 깊이가 점점 깊어진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공무변처가 깊어진만큼 식무변처가 깊어집니다.
흔히 '지 관 쌍수'라는 말을 합니다.
지는 그칠지이고 관은 볼관 또는 드러날 관입니다.
여기서 그친다는 것은 '마음이 그쳤다'는 뜻입니다.
관이라는 말은 '본다는 뜻고 드러났다'는 뜻이 됩니다.
허나 볼견자와는 다릅니다. 볼견은 한번에 하나씩 보는 개체적 행위가 됩니다.

볼관은 보는 것이 아니고 '세상이 드러나서 비추이는 상태'를 말합니다.
물론 궁극의 관은 이것도 넘어선 것입니다.
쌍수라는 말 자체가 쌍으로 딱는다는 것이지요.
닦는다는 것 자체가 궁극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관은 분명 궁극이나 식무변처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는 다 '관'으로는 쓰지만 관의 성격을 띠었다는 것일 뿐 궁극의 '관'은 아닙니다.

공무변처나 식무변처나 '머문다'는 뜻이 의미하듯이 더 나아가야할 공부의 여정인 것이지요.

둘의 공통점은 '무심삼매'라는 것입니다.
사실 무심이나 삼매는 같은 의미입니다. 이것을 두 번 중복해서 쓴다는 것도 조금 이상하긴 합니다만 이해를 돕기 위하여 중복으로 썼습니다.

사마디의 뜻 중에서 하나가 '초월의식'입니다.
여기서 의식이란 현대 용어의 의식이 아닙니다.
의는 현대용어의 '의식'이 맞으며
식은 현대용어로는 '무의식' 입니다. 불교용어로는 아뢰야식이 됩니다.
즉 초월의식은 '의식과 무의식'을 모두 초월하였다는 것이며
그러하게 초월하였을 때 '죽었다는 것'이 아니며 무엇이 있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것이 무심입니다.
즉 우리가 심(마음)이라고 쓰는 것은 의식과 무의식을 총칭하는 것이 됩니다.
즉 의식과 무의식이 없다 또는 사라졌다의 상태가 무심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심과 사마디는 같은 뜻이 됩니다.

즉 둘의 공통점은
무심이며 나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둘의 다른 점은 하나는 세상도 사라졌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세상이 모두 드러났다는 것이 됩니다.

왜 이러한 여정일까 한번 여겨보시면 자명해 집니다.
우리의 잡생각 상태로는 온전하게 세상이(이것이 다 나다) 다 드러날 수 없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개체가 있는한 전체가 된다고 하는 것이 모순이 됩니다.
전체라는 것 또는 진아라는 것이 있건 없건 그것이 있다고 가정하고 되려고 하는한 '개체성의 상실'이 선행되야 한다는 것이 논리적입니다.

이것을 다른 비유해 봅니다.
여기 스크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영화가 상영되고 있습니다.
다만 영사기가 스크린에 영화를 쏘는 이분법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스크린이 스스로 영화를 뿜어내는 시스템이라고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이러할 때 영화따로 스크린 따로 이야기 할 수도 있고 또는 영화와 스크린은 하나라고도 이야기 할 수 있겠지요.

영화관의 영화는 3시간 지나면 영화가 끝나고 드디어 하얀 스크린을 볼수 있습니다.
헌데 위에서 비유한 영화는 영원히 끝나지 않습니다.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의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해서 사람들은 스크린을 영원히 볼 수 없습니다.
허나 누군가는 영화가 있으려면 스크린이 있어야 한다는 이치를 사유해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방법을 쓰건 스크린을 보려고 하겠지요.
그때 일순위로 떠 올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요?

스크린 위에서 벌어지는 영화에 집착하는 동안은 영화위에서 예스 노우의 자유의지라는 선택의 다람쥐쳇바퀴를 굴릴 것은 너무도 자명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크린을 보기로 작정하였으므로 일단 영화에 관심을 지우려고 합니다.
즉 영화에 대한 집착을 버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안 버려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어느 하나의 집중 할 수 있는 수행주제 또는 수행대상을 선택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영화애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방법이 됩니다.
이것을 금강경으로 본다면 '색성향미촉법에 마음을 머무루지 말라'는 내용이 됩니다.

즉 영화위에 어떤 것에도 마음을 머무르지 말라는 뜻 입니다.
이때 강물이 수심으로 들어가듯이 우리 마음이 내면으로 향한다는 것은
바로 영화위에서 스크린쪽으로 즉 안쪽으로 향한다는 것이 됩니다.
비유하자면 영화와 스크린의 중간쯤의 상태가 일심삼매가 됩니다.
즉 수행주제 하나만 남고 영화가 상영 되건 아니건 이제 그것들은 모두 초월하였다 또는 사라진 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수행주제의 영화만 사라지면 이제 모든 영화가 사라집니다. 스크린만 남습니다.
영화가 사라졌다는 모든 물질을 초월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물질은 보이는 물질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허공이라는 비물질도 물질입니다. 여기서 물질은 색을 말합니다. 공색 할때 그 색입니다.

색이란 세상전체를 말합니다. 물론 더 나아가면 저세상까지도 모두 색입니다.
즉 영화자체가 모두 색입니다. 스크린을 공에 비유한 것입니다.
모든 영화가 사라지면 공이 드러납니다.
이것이 공무변처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영화가 모두 드러나면 이것이 식무변처입니다.
영화가 모두 드러나도 거기에는 '나, 즉 마음과 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개체성의 인식의 오류 내지 작은 범뮈가 없습니다.
그때 영화가 전체로 드러납니다.

그러나 위에서도 밝혔듯이
저러하게 스크린이 드러난 상태의 경지도 천차만별입니다.
공무변처가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 하면서 점점 더 본질이 드러납니다.

무심삼매가 어느정도 되면 잠에서 깨어있게 됩니다.
물론 그 전에 이미 꿈에서 깨어난 것을 거치게 됩니다.
위의 둘도 무심삼매와 같이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를 반복하면서 깊어집니다.

잠에서 깨어난다는 '깨어있음'이 주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웁니다.
비유하자면 병원에서 전신마취를 하여서 의식 무의식이 전부 없는데도 불구하고 스스로 '깨어있는' 것을 순일이는 '깨어있음'이라는 단어로 씁니다.
딱히 쓸 수 있는 단어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깨어있음을 한자로 말하면 '각'이 됩니다.
깨달을 각자로 쓰는데 순일이는 '깨어있을 각'으로 쓴 것입니다.
저러한 깨어있음이 생시 꿈 깊은잠 사후를 모두 초월합니다.

우리가 흔히 의식을 마음이라고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을 '나'라고도 믿습니다.
그 마음이 '나'라고 믿는 근거 중에서 하나는 '기억의 연결성'을 들 수 있습니다.
80생을 살았다고 한다면 낯동안의 기억은 연결이 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꿈의 의식과 대낯의 의식은 같은 것일까요?

과학이 말하길 하룻밤에 많은 꿈을 꾼다고 합니다.
렘현상이라고 눈동자를 뒤룩뒤룩 굴리면서 꿈을 꾸었다가 또 안 꾸었다가 또 꾸었다가 하면서 말이지요.
헌데 우리 누구나 그 많은 꿈을 기억할까요?
새벽2시에 꿈을 꾸었는데 그 때 깨어났다면 즉 생시의 의식으로 돌아 왔다면 물론 기억합니다. 그것은 꿈의 의식에서 생시의 의식으로 돌아오면서 두 개의 의식이 오버랩했기 때문입니다.

헌데 색벽2시에 깨지 않고 아침 8시에 깨었다면 대다수는 밤 내내 있었던 꿈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꿈의 의식과 생시의 의식이 다르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혹자는 98퍼센트의 생시의 식은 잠이 들고 2퍼센의 의식이 밤에 꿈을 꾸었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단 2퍼센트의 의식이 꿈을 꾼 것이라면 최소 2프로는 꿈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아가 이것은 퍼센트의 의미로 나눌 수가 없습니다. 의식이란 단 2프로가 꿈을 꾸었다고 하여도 모든 꿈을 기억에 연결선상에 가져야합니다.
위에서 이야기 하였듯 의식은 기억의 연결선이라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의식 또는 마음을 잠시 이야기 해 본 이유가
의식은 꿈만 꾸어도 사라지며 꿈속에서 재생의식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긴 이야기라 이것에 대하여는 생략합니다.

나아가 꿈도 없고, 잠꼬대도 없고, 영상의 씨앗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깨어있는 이름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습니다.
즉 아무런 대상이 없음에도 스스로 있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깨어있음'이라고 순일이는 표현하는데 이것만이 생시 꿈 깊은잠 사후 모두를 초월하여서 유일하게 있는 불멸입니다.

있다가 사라지면 그것은 생멸입니다.
모든 것의 이면에 본질로 있는 것 그것이 바로 '께어있음'입니다.
헌데 이것을 있다 없다로 이야기 하기도 어렵습니다.
있다는 것은 형체가 있거나 또는 마음처럼 형체는 없는 듯 하여도 찧고 &#48751고 하는 파동 내지는 성질이 있어야 합니다. 허나 그 깨어있음은 이러하게 우리가 비유나 사유할 수 있는 그러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없다고 이야기 하면 편하겠지만 그것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없는 상태로 있습니다.

유심이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마음입니다.
무심이 있습니다.
무심은 마음이 없으니 아무것도 없다가 아닙니다.
유심이 사라진 상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심의 '심'이 있지요.
즉 무심의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유심은 파동이라고 본다면
무심은 정지선입니다.
뇌파로 비유한다면 파동의 형태를 그린 것이 유심이요
일직선이 무심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직선이 모든 파동의 형태를 그려내고 있는 것입니다.
파동은 형태의 상이점에 따라 성질이 달라집니다.
즉 유심과 무심 모두 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둘이냐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이야기는 참으로 길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다만 열역학 제1법칙을 하나 이야기 해 봅니다.

에너지는 우주내에서 새로이 생길수도 소멸 될 수도 없다
다만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할 뿐이다.

이것이 하나의 법칙입니다.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것은 불생불멸입니다 또는 불변입니다.
하나의 형태에서 다른 형태로 변한다는 것은 '변' 입니다. 변하는 것은 늘 생멸을 하니 또한 '생멸'입니다.

그러므로 위의 말을 요약하면
불생불멸이 생멸한다
또는 불변이 변한다는 소리가 됩니다.
말도 안되는 이야기지요.
허나 말이 됩니다.
전체의 에너지는 불생불멸이며 불변이라는 소리이고
각각의 작은 에너지의 관점에서 볼때는 변하고 생멸을 하는 모습을 띤다는 것입니다.

허나 후자 마저도 변할 뿐 진정한 생멸은 없는 겁니다.
물이 기화되서 구름되고 다시 비로 내려와서 물이 되고 얼음이 되고
성질은 변해도 물은 하늘나라 가서 구름되니 죽는줄 알겠지만 옆에서 보는 우리는 죽은 적이 없다고 압니다.

이와같이 겉으로만 생멸을 지은 듯이 보이는 겁니다.

자 그러면 밑에 생멸을 짓고 변하는 것이 바로 개체성 또는 '색'이 됩니다.
위의 불생불멸 전체정이 바로 '공'이 됩니다.

요약하면
공이 색이다. 색이 공이다.
이것입니다.
완전히 하나입니다. 에너지가 각각의 에너지가 있지만 그것이 또한 전체로서 하나의 에너지입니다.
문제는 개체는 전체가 하나의 에너지라는 것을 모릅니다.
체험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무심삼매입니다. 물론 깊은 경지를 말합니다.
즉 무심이 공이고
유심이 색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리가 흔히 생긴적도 없고 소멸할 수도 없다는 말을 들으면
'그래 그건 아무것도 없는거지. 생긴적이 없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당연히 소멸할 수 없는 거지'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에너지는 분명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새로이 생길수도 소멸할 수도 없듯이
'깨어있음'은 분명히 있는 것입니다.
허나 그것은 생긴적도 없고 소멸할 수도 없습니다. 나아가 검증할 수도 없습니다.
자기만 체험할 수 있습니다. 에너지처럼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다는 이야깁니다.

에너지 = 질량 이라고 아인슈타인이 이야기 했다고 들었습니다.
에너지는 무형이요 질량은 덩어리라고 들었습니다.
즉 질량은 유형이라는 이야깁니다.
형태로 본다면 둘은 분명히 다릅니다.
허나 아인슈타인이 과학으로 이것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이치상 같은 것이라는 것이 자명한 것입니다. 에너지란 형태만 없을 뿐이지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닌 힘 또는 성질이 있기 때문입니다.

공 ------------ 에너지 ----------------- 물질

이 셋은 모두 같은 것입니다.
열역학 제 1법칙에서 보았듯이
공은 다만 본질이며 전체입니다.
물질화 될수록 개체성입니다.
개체성은 형태가 있습니다.
중간에 작용인 에너지는 형태가 없으나 성질과 힘이 있습니다.
공은 그러한 것도 없습니다. 검증할 방도가 없습니다.
공은 그러한 모든 것은 지어낸 '깨어있음'이 있습니다.

위에서 보았듯이

유와 무는 하나입니다.
하나의 다른 형태입니다.
또는 유무의 본질인 '깨어있음'이 지어낸 양변이 유무입니다.

무심이 유심이며 유심이 무심이니
이제 유심인 우리들이 무심이 되어보면 열역학 제 1법칙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과학자가 순일이의 위의 이야기를 들으면 반박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열역학 법칙은 단순히 에너지 불변의 법칙 또는 에너지 보전의법칙을 이야기 한것인데 그것을 확대 해석했다고 말이지요.

즉 에너지가 어떻게 생긴지는 몰라도 일단 생기고 난 다음에는 불멸이다 이러한 이야기가 됩니다. 헌데 에너지가 있는 상태에서도 더이상 새로이 생겨나거 소멸할 수 없다면 애초에 없었던 상태에서는 어찌 생겨 날수 있다는 말인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될 겁니다.

있는데도 더 이상 새로이 생겨날 수 없다면 아예 없었던 상태에서 생길 수는 더군다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시작도 끝도 없다는 무시무종을 갖다 붙였습니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무소유처 비상비비상처등은 이야기를 생략합니다.

이 모든 것이 순차적으로 벌어져야 하는지를 말씀하셨지요?
연쇄반응입니다.
팔삼매는 앞에 것을 깊이 하면 뒤이어 누구에게 배우지 않아도 당연히 다음 삼매가 됩니다.

또한 다음 삼매 없이 점프해서 그 다음 것이 되고 하는 그러한 일은 없습니다.
다만 삼매의 깊이가 아주 빨리 되어서 다음 여정이 빨리 되고 하는 일은 있습니다.
간혹 국민학생이 바로 대학교를 가듯이 말이지요. 허나 그 아이도 중학교 고등학교를 안 갔다는 것일뿐 그 공부를 하기는 하였겠지요.

팔삼매는 그 삼매가 얼마나 깊있게 되었느냐가 진리가 얼마나 되었느냐의 상태입니다.

여기서 진리라는 말을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원하였습니다.
그러나 '깨어있음'이라는 말이 더 낫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진리라는 말을 쓴 이유는
삼매가 그 자체가 목적이자 방법이기도 하다는 의미로 쓴 것입니다.
진리는 말 그대로 참된 이치입니다.

참된 이치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본질이 된 상태를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되게끔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이지요.

즉 무심삼매 자체가 본질이지만 이것을 만약 방법적인 측면에서 이야기 해본다면
그것으로만 가는 길은 지난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일원상의 전체 여정의 이치를 먼적 숙고해야합니다.
그러고나서 삼매의 일원상의 여정과 이치와 방법을 알게되면
이제 순탄히 나아갈 길이 됩니다.

참으로 많은 선생들이 무심삼매 하나 붙잡고 가면서 되었다가 아니 되었다가 하여서 좌절들을 하는지 알면 놀랄겁니다.

그래도 꽤 많은 이야기들이 이 글 보다는 상세하게 '삼매'라는 책에 쓰여져있습니다.

늘 평화로우소서
순일 두손모음

추신.
그냥 쭉 쳐 나간 글이라 오타와 문장상 오류가 있을지 모릅니다.
양해바랍니다.

문성호 : 소중한 말씀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글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순일 이동호 : 도움이 되신 듯 하니 감사할 뿐입니다.
함박눈이 참 소복합니다.

늘 평화로우소서
순일 두손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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